사랑이신 하나님(요일 4:16)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 이유는 인간은 배로 자식을 낳지만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 1:1) 하나님께서는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낳으시기 때문입니다.
(약 1:18) 그러나 지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에게는 성장의 단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모든 인간을 영적으로 성장시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과정을 셋으로 단계화하신 것이지요.
따라서 “내 아버지는 농부”(요 15:1)라고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땅에 비유하신 후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심으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 4:28)고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이미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눅 8:11)라고 하셨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하셨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서 때에 따라 주시는 세 단계의 말씀을 받아 온전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인데 주후 2천년이 지난 우리 시대에 바로 하나님의 추수 때가 이른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사랑 세계선교회>가 전하는 모든 말씀은 다윗의 뿌리 하나님의 “진리의 사랑”(살후 2:10)을 증거하는 것이며 지구상의 모든 분들에게 보내는 영적 각성 촉구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당신이 세상에 내리시는 “네 가지 중한 벌”을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에스겔 14:21)으로 말씀하신 바 있는데 놀랍게도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그 가운데 세 가지가 동시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코로나 19라는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창궐하는 때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쟁이 발발하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이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는 가운데 중동지역에서 다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이 펴낸 ‘글로벌 리스크 리포트 2024’에도 나타나 있지만 인류사회에는 연속되는 기후 이상 변화에 따른 자연 재해, 인공지능(A.I) 등 기술의 발전에 따른 역기능 등 많은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쟁을 상징하는 칼과 기근, 지진 등의 기후 재앙과 잠잠하던 코로나의 새 변이 바이러스인 코비드 오미크론 XBB마저 고개를 들고 있어 세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데 나머지 “사나운 짐승”조차 세대주의자들의 해석처럼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세상 끝날에 나타나리라고 계시된 666의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 의미 또한 단순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징조들이 예수께서 세상 끝날과 관련하여 예언하신 말씀, 즉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0~11)는 말씀과 일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감안하면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종말을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고 깨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이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베드로사도의 예언처럼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는 종말이 임하겠지만 영이 깨어 있는 신앙인들에게는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살전 5:4)라는 말씀이 언제나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올라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 이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 말씀에 대한 굳센 믿음과 순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16~17)고 말씀하셨건만 아담과 하와는 결국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는 말씀처럼 모든 인간은 원죄를 지니고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흐릿한 저녁처럼 죄로 얼룩져 영이 죽어버린 아담과 하와를 불쌍히 여기시고 에덴에서 추방하심으로 선과 악,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양극성의 세상 속에서 선과 빛의 소중함을 체험하는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놀랍게도 구약시대의 선지자 호세아는 지구 행성에 사는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단 사흘로 축약하여 제시한 바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 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세아 6:1~3)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호세아의 외침은 인간이 부딪치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므로 무엇보다 에덴동산 이후 하나님과 분리되고 단절되어 있는 현실의 극복이 최우선의 과제임을 강조함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고 치셨다고 언급한 첫째 날은 그래서인지 호세아가 살던 당시의 이스라엘의 현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이라 확신하며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면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일러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 같이 어김없나니” 라고 했으니 그러면 그 날은 대체 언제일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듯 호세아의 예언대로 우리를 살리시는 새벽빛이 이스라엘 땅에 나타났습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6)
예수께서는 캄캄한 어둠에 갇힌 세상을 비추는 새벽빛으로 나타나신 때문인지 스스로를 “광명한 새벽별”에 비유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와 사천 년이 지났어도 호세아가 보기에는 예수께서 오시기 전의 세상은 그저 첫째 날 하루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찢으셨으나”가 암시하듯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추방 이후 하나님과 분리되고 단절된 시대, 그리고 “우리를 치셨으나”가 암시하듯 노아의 홍수를 거치고서도 양심과 율법을 따르지 않고 한결같이 죄의식 속에서 살아야 했던 시대를 첫째 날로 간주하고 다윗의 자손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비로소 둘째 날이 밝아오는 것으로 계시한 것이지요. 사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가 가리키듯 예수께서는 죄에 갇혀 죽어 있던 영들을 살리기 위해 “광명한 새벽별”로 세상에 오신 것이니까요.
다만 새벽이란 완전한 빛이 자리 잡은 때가 아닙니다. 광명한 새벽별이 세상에 뿌려주는 새벽빛으로 영혼의 자유를 얻었지만 시편 84:11절의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해가 떠올라야 가장 깊은 어둠인 사망의 권세가 물러나고 셋째날 “늦은 비”의 성령이 오심으로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는 호세아의 예언대로 모두가 생명의 부활(요 5:29)로 나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본다면 “광명한 새벽별” 되시는 다윗의 자손(계 22:16) 예수께서는 어김없이 새벽빛같이 나타나 죄로 죽어 있던 우리의 영을 살리셨고 셋째 날이 이르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 속에 나타나시어 사망의 권세를 꺾어서 우리를 일으키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창세 전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대로(엡 1:3)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땅을 적시는 늦은 비”야말로 “진리의 성령”(요 16:13)으로서 “이삭의 때”를 튼실하게 하시고 “이삭에 충실한 곡식”(막 4:20)으로 열매 맺게 하신 후 아버지의 집에 마련하신 영원한 처소로 우리를 데려가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이자 다윗의 뿌리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의 은사임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 (계 22:1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뿌리가 계신 한, 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는 본래 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줄기와 가지와 나뭇잎들의 성장을 보면서 우리는 뿌리의 존재와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지요. 오늘날 우리는 그 잎과 가지와 줄기의 변화를 목도하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세계의 변화를 통해서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가지가 뻗어야 하고 그래야만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의 마음을 모르면 성장기에 새로운 가지가 뻗어나가고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이단 논쟁으로 비판과 정죄를 일삼게 됨을, 우리는 지난 이천 년 교회의 역사 속에서 똑똑히 보아 왔습니다. 변화 많은 역사 앞에서 우리가 더욱 겸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우리를 일으키시는 “셋째 날”이요 인자의 날이 도래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마지막 때라면 예수라는 이름 아래에 있는 세계 그리스도교 형제와 자매들은 자신이 로마 카톨릭교, 동방정교, 개신교 어디에 속해있고 어느 교파에 속해 있으며 어떤 직분을 맡고 있든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호세아의 절규처럼 영생의 열매들을 추수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한시바삐 생명의 부활로 나와 진리의 말씀으로 자식을 낳으시는(약 1:18) 하나님의 추수 일을 도와드려야 할 것입니다.